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문단 편집) === 아타우알파를 처형하다 === 상황이 정리되자 피사로는 황제를 안심시켰다. * 첫째, 우리는 기독교의 신 아래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의 이름으로 수많은 왕국들을 정복한 무적의 전사들이니 전쟁에 지고 포로로 잡혔다고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말 것. * 둘째, 툼베스를 비롯 저 멀리 [[아즈텍]]이나 파나마에서 우리에게 복종하고 충성한 사람들은 다 자유롭게 풀려났다는 것. * 셋째, 우리는 평화적으로 만나달라고 간청했는데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집어던지며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아타우알파도 이번에는 용케 속뜻을 전부 알아들었는지,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은 휘하 장군들이 잘못된 간언을 했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이미 일전의 전투에서 전부 죽었다는 식으로 스페인인들의 비위를 맞췄으며, 살아남은 잉카인들에게 명령을 내려 더이상 도망치거나 당황하지 말고 계속 황제를 따르라고 했다. 이로서 피사로는 한숨 돌리게 된 셈이었다. 피사로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식민지]] 건설 및 본인이 그곳의 총독이 되는 것'''이기에 그로선 마치 대영제국이 인도 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잉카의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를 최대한 옆에 끼고 있어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했기 때문에[* 훗날 영국에서도 [[세포이 항쟁]] 이전까지는 델리 주변만 유지하는 지방 정권으로 전락한 [[무굴 제국]]을 당장 멸망시키진 않고 최대한 이용해 먹었다.] 황제를 죽인다거나 잉카에 대해 정복전쟁을 벌인다거나 할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그나마 휘하 병력이 1,000명 단위인 데다 [[틀락스칼텍]]이라는 든든한 동맹 원주민 세력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아타우알파를 잡은 시점에서 피사로의 목표는 1차적으로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차근차근 공을 들여 잉카의 통치체제를 스페인에 흡수하는 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하필 [[아타우알파]]는 이방인들의 약점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금]]과 [[은]]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들에게 제안을 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잡혀 있었던 방의 부피만큼 황금과 은을 줄 테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아타우알파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포된 이후에도 잉카인들 앞에선 냉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시종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고 하며, 매일같이 만찬을 열어 스페인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의 앞에선 황제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매우 활기차고 다정하게 굴었다고 하는데, 특히 에르난도 데소토와 피사로 가문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와 친해져, [[체스]]를 두는 법을 배웠고 몇 시간씩 같이 두었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의 기록 또한 호의적이어서 황제는 매우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막대한 양의 재화를 수집하고 분배하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것이다.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아타우알파 입장에선, 수도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인질로 잡혀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또, 피사로 입장에선 운 좋게 황제를 생포하긴 했으나 선발대 인원이 너무 적어 쿠스코에 입성하기엔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툼베스까지 황제를 끌고 갈 수도 없었던 것이, 그렇게 되면 황금을 수집해서 운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키스키스를 비롯한 잉카의 장군들은 자신의 주군을 구하겠다고 위협 행동까지 벌였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피사로의 구원 요청 + 황제 생포라는 희소식을 들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서둘러 후발대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이는 아타우알파의 사망을 낳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버렸다. 왜냐면 후발대는 아타우알파 체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산 분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마그로의 일행 250명의 입장에선 바로 코앞에 막대한 양의 금•은 보화가 존재하는데 늦게 왔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갖다 대지 못하게 되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스페인인들 사이에 질투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알마그로 일행은 피사로의 의견에 일단 '''이의 있음'''부터 외치게 되었고 아타우알파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는 사이 잉카의 재물이 다 모였다. 그리고 피사로의 원정대가 '''전부 용광로에 넣고 녹여버렸다.''' 단지 휘하의 장병들에게 재물을 정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녹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기병 1인당 은 82kg와 금 41kg, 보병들에겐 그 절반이 분배되었다. 이를 2014년 기준 시세로 계산하면, 기병 1인당 18억원, 보병 1인당 9억원 정도 받은 셈이었다. 물론 16세기 시세로는 피사로의 경우, 기병의 7배를 받았으며, 아타우알파로부터 보너스로 80kg짜리 황금 가마까지 선물받았다고 한다. 한편, [[카를로스 1세]]는 도장 한번 잘 찍어준 덕분에 금 1톤과 은 2톤을 받았다. 그런데 '''아타우알파는 [[절망]]했다.''' 황금을 다 모았는데도 풀려날 낌새는커녕 새로운 스페인인들이 도착한 데다가, 이들은 자기들이 재물 분배에서 제외되었다며 흉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무렵 피사로는 어느 잉카 귀족에게 무심결에 '''"각 족장마다 스페인인을 한 명씩 붙여서 제국을 통치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는데 이를 아타우알파가 들어버렸다. 또 하필이면 피사로 집안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가 스페인로 돌아갔다.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형 피사로와 알마그로 간의 분쟁도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페인인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에르난도 피사로가 떠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타우알파는 '''울음을 터뜨렸으며''' 에르난도가 떠나게 되면 알마그로 무리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에르난도 피사로 본인도 몇 년 뒤 국왕에게, >"폐하, 아타우알파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하여, 자기도 [[스페인]]으로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이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런 의심을 주변인들에게 숨기지 않고 전했다. 이로 인해서 급기야 아타우알파가 비밀리에 휘하 장군들에게 전갈을 보냈으며, 이들이 카하마르카를 향해 [[행군]] 중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당연히 스페인인들은 심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에르난도 데소토가 기병 몇 명을 이끌고 정찰을 위해 떠났는데, 소토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니카라과]]에서 데려온 원주민이 달려와, >'''"도시 주변에서 잉카군을 목격하였소!"''' 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스페인인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으며, 격론 끝에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때,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황제를 살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처형에 반대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알마그로가 강력하게 처형을 주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자신이 처형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아타우알파는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엉엉 울면서 이들의 뒤통수를 친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으며 황금과 은을 2배로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이미 스페인인들은 의심암귀에 들린 상태였다. 결국 1533년 7월 25일, 아타우알파는 억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종해도 사형이지만, 개종을 거부할 시 이교도로 간주되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진다. [[답정너|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개종할 수밖에 없다(...).]]] '''[[교살]]된 뒤 시신은 불태워졌다'''. 죄목은 [[근친상간]][* 잉카 황제는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누나]]나 [[여동생]]과 [[근친혼|결혼했다.]]], [[일부다처제]][* 당연히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 [[우상숭배]]였다. 기록에 따르면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매우 안타까운 나머지 흐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아타우알파]]가 죽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낚시|온다는 잉카 대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정찰을 마친 뒤 귀환하여 '아무리 찾아봐도 잉카군은 없습니다.'라고 보고하며 확인사살을 했다. 피사로는 또 한 차례 흐느꼈으며, 황제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소토는 그야말로 격분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토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더불어 황제와 가장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이다. 이때 소토 역시 에르난도 피사로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차리리 황제를 스페인으로 보내버리면 되는 것이지, 왜 굳이 죽이는 거냐고, 왜!" 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소토나 에르난도 피사로 둘 중 한 사람만 현장에 있었어도 아타우알파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은 원정대에 참여했던 여러 스페인인들의 기록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내용이다. '''피사로가 황제의 처형을 반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1969년작 영화 <태양 제국의 멸망>에서는, 한 가지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피사로는 하류층 출신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신앙을 강요하는 성직자들에 대항해 아타우알파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들은 성직자가 아닌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왕실 회계사인 알론소 리켈메였으니 이는 약간 무리한 해석이다. 알마그로와 리켈메가 어찌나 아타우알파를 싫어하는 티를 냈는지 처형되기 전부터 아타우알파는 이 두 사람이 결국 자기를 죽일 것이라 말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